유성준

제목

구한말의 역사만큼이나 그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살아온 발자취속에 하나님의 발자취가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이다. 1885년 그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로와 함께 배를 타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는 선상에서 한국 선교에 동참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유자로서 사교를 어찌 믿으랴!“ 거절했다. 그러던 그가 1902년 감옥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1909년 안동교회의 설립자중 한 사람이 되었다.

  • 1860년 9월 7일(음력) ~ 1934년 2월 27일(양력)

유성준

안동교회

개신교 한국선교의 문을 연 사람은 알렌이다. 1884년 9월 20일 중국선교를 하던 알렌은 조선의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당나귀를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허용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집에서 조용히 가족들과 에배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이곳에 보내신 뜻과 섭리를 헤아리던 중 1884년 12월 4일 한국선교의 일대 전환이 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수장인 민영익이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중상을 입었다. 이때 알렌은 그의 회고록 "Things Korea" 에서 걱정과 불안속에서 석달이나 치료해 주었다고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885년 4월 10일 지금의 헌법재판소 내 자리에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광혜원은 구리개의 제중원의 전신이며 당연히 한국선교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던 곳이며 제중원 안에는 미조직된 교회들도 있어 오늘날의 공유교회의 역할을 했었다. 남대문교회 뿐만 아니라 승동교회가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광혜원은 현재의 헌법재판소가 있는 곳에 있었다. 정문에서 광혜원 터를 보러 왔다고 경비하시는 분에게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문을 열며 천천히 안을 보라고 했다. 헌법재판소 내에는 오래된 백송도 있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윤보선 생가와 이번 일정의 종착지인 안동교회 종탑도 볼 수 있었다.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은 바다 건너 일본에 유학하던 유성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유성준은 안동교회 설립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하던 중, 개화파인 유길준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반대파에 의해 학비가 끊기게 되었다. 일본주재 선교사 매클레이의 도움으로 동경 아오야마학원에 전학할 수 있었다. 이때 유성준은 가금씩 예배 참석했으나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1885년 메클레이는 유성준을 아펜젤러에게 소개하여 그는 잠시나마 에펜젤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85년 3월 31일 나가사키항을 출발하여, 4월 5일 제물포항으로 입국할 때 유성준은 언드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입국하였다. 물론 입국중 선상에서 함께 한국선교에 동역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유성준의 회고록에 의하면,

“나는 [매콜네]씨의 소개로 그에게 조선국문을 교수하였고 귀국할 때에는 [아펜젤러]씨와 동행하면서 전도도 많이 듣고 또 조선전도사업에 동역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세계 유일인 공부자 대성인의 정도를 준봉(遵奉)하는 당당한 유자(儒者)로서 사교를 어찌 믿으랴 하고 거절하였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우연하게 일어나듯 보이고 또 당장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한국에 입국한 지 18년이 되던 해, 유성준은 일본에 머물고 있는 형 유길준과 내통하여 모반을 하였다는 일본유학생혈명혈약사건으로 감옥에 투옥된다. 이때 여러 선교사 특히 언더우드와 벙커 선교사가 매주일 면회를 와서 한문으로 된 기독교 관현 책을 건네주었다. 그러던 중 1902년 12월 언더우드 선교사가 옥중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던 중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랜 불신의 벽이 허물어지고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옥중에서 유성준을 포기하지 않는 선교사들의 손을 통하여 일어났다.

1905년 4월 유성준은 감옥에서 나와 게일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연동교회에 출석하며 YMCA에서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여러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1909년 3월 7일 박승봉, 유성준과 김창재의 집에서 안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이때 승동교회 백정 박성춘이 장로가 되면서 일부 양반 교인들이 이탈하여 안동교회에 모였다.

승동교회 110년사에 보면 안동교회가 설립되던 당시의 감사함과 서운함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민 간데다가 양반교우들이 안동교회로 간다고 떠나가게 된 것은 승동교회로서는 서운한 일이었다. (승동교회 110년사 p147)"

당시 연동교회는 양반과 중인이 모였고 승동교회는 양반과 백정이 모였다면 안동교회는 순수 양반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안동교회의 성장과정에서 곽안련 선교사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안동교회가 미조직교회로 있을 때 임시당회장을 맡아 교회부지를 매입하는 등 여러 도움을 주었다. 안동교회는 곽안련 선교사가 안식년을 보내던 1910년 한석진 목사를 청빙하여 스스로 자립의 길을 걸었다.

안동교회를 방문했을 때, 안내하시던 분이 보여 주었던 100년도 넘은 강대상과 초기부터 사용했던 여러 성물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교회 설계도는 CD로 만들어 보관 중이었고 교인들을 돌보았던 교적부도 소중하게 보관이 되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본당 2층에 징이 있었는데 예배 시작 전에 3번을 울리는 것이 전통이라고 했다. 안동교회는 옛것과 현대적인 것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 온김에 북촌의 여러 곳을 둘러보며 일정을 마쳤다.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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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교회 담임목사

울산광림교회에서 전도사(2000.4 ~ 2002.8)로 섬겼다. 풍성교회에서 전임전도사, 강도사, 그리고 부목사로 섬겼다(2002.8 ~ 2010.12). 2011년 인천광역시 계양구 효성동에 교회를 개척하여 조선에서 14년을 사역하는 동안 양 반과 백정의 신분의 벽을 넘어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곤당골교회를 시작으로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를 세우다 부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를 이어, 이 땅에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양 한 문화의 사람들과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엡2:22)를 세우고 있는 목회자이다.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
  • (현)다인교회 담임목사(2011 – 현재)
  • (전)GMS국내다민족사역연합체 출판팀장(2020-2021)
  • (전)계양구다문화가족협의회 위원(20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