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F. 무어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방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조선에서 14년을 사역하는 동안 양반과 백정의 신분의 벽을 넘어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곤당골 교회를 시작으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를 세우다 부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종
- 국내선교기간
1892년 9월 19일 ~ 1906년 12월 22일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양화진으로
1892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북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사무엘 F. 무어 (1860-1906) 선교사가 양화진 나루터에 첫발에 내디뎠다.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2년 전이었다. 당시 많은 선교사는 제물포항을 통해 육로로 도성까지 왔지만,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제물포에서 목선을 타고 강화를 거쳐 양화진으로 왔다. 우리가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를 찾은 이유는 그가 이 땅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양반과 백정의 신분 질서의 벽을 허물고 공존하는 교회공동체를 세운 것과 단순히 사회개혁 운동가가 아니라,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참된 교회 운동을 100년 전 이 땅에 일으킨 준비된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그의 묘비는 6.25를 겪는 동안 해독이 어려울 정도로 파손이 되어있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으로 복음이 추구하는 방향을 가장 잘 교회를 통해 실현시킨 귀한 선교사이다. 훗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잇는 길선주 장로는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세운 승동교회(현 인사동)에 부흥회로 와서 "그리스도가 승리한 복음의 등대"라고 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복음을 통해 참된 교회 운동을 이 땅에 100년 전에 일으킨 선구자이다. 이제 그를 만나기 위해 김유경 대표 부부와 두 번의 예비모임과 자료조사를 마치고 직접 그가 걸었던 그 길로 가보기로 했다.
우리는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배를 타고 도착한 양화진 나루터를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합정역에서 7번 출구를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도착할 수 있다. 입구를 바라보고 왼쪽에는 태극기를 포함하여 7개 나라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우리는 입구에서 국기를 바라보며 왜 7개의 국기만 게양되었는지 의문이 생겼다. 묘원 개요를 보면 안장자 출신 국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포함한 15개국이지만 선교사 출신 국가는 7개국(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스웨덴, 영국, 일본, 캐나다 그리고 호주)이었다. 우리는 7개의 국기가 조선에 선교사를 보낸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는 일본의 국기도 있었는데, 동행한 사이토 슌스케 집사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일한 일본인 선교사 소다가이치(曾田嘉伊智)라고 말했다. 이곳에 온 김에 그가 묻힌 곳도 보기로 했다.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묘원은 A-24로 표시된 곳에 있다. 1906년 장티푸스로 제중원에서 눈을 감고 이곳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치되었다. 묘원 앞에 서면 승동교회와 동막교회의 성도들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첫 사역의 열매이자 마지막 사역의 열매인 두 교회의 성도들이 세운 의미 있는 기념비이다. 그곳에는 조선에서의 14년의 행적이 짧게 기록이 되어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인생을 기억해 주는 교회와 성도들이 있고, 또 그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우리 같은 사람이 있으니 비록 46살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14년의 조선에서의 사역과 그의 죽음은 결단코 헛되지 않았으리라!
마침, 아들과 손자와 함께 오신 분도 그곳에 우리와 함께 있었다. 우리는 사무엘 F.무어 선교사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우리에게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세례를 주고 승동교회의 장로가 된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와 제중원의 의사가 된 박서양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14년 행적을 찾아 이곳에 왔다"고 말하니 매우 기뻐하였다. 자신은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에게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를 알려주고자 왔다"고 한다. 대를 이어 3대까지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삶이 전해지고 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옛 묘비는 6.25를 거치는 동안 파손이 되어 몇 글자는 떨어져 나가 있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와 동시대를 살았고 14년 동안 함께 동역했던 올리버 R. 에비슨(1860∼1956) 선교사를 찾아 F-47묘원으로 이동했다. 이곳도 다른 팀이 와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인솔자를 통해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의 삶에 대해 들었다. 그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우리는 남아 묘비와 안내판에 새겨진 글귀를 자세히 보고서 이곳이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의 아들과 며느리의 묘원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가 아닌 그의 아들과 며느리가 이곳에 묻히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는 조선에서의 42년 사역을 마무리하고 1935년 은퇴하여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6년에 플로리다에서 돌아가신 후 부인과 함께 캐나다 스미스 폴즈의 힐크레스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부산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 더글러스 B. 에비슨(1893-1954) 선교사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1920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다 캐나다로 귀국했다. 1952년 8월 4일 그의 아버지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 보다, 먼저 부름을 받아 벤쿠버에서 별세하였다. 조선에 묻히길 간절히 원하였기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의 아내 캐들린 로슨(1898-1985) 선교사는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남편이 있는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이곳에 합장하였다. 참으로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의 가족은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잠시 기도한 후 올리버 R. 에비슨과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곤당골교회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4년 백정에서 장로가 된 박성춘을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와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고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교회도 화재로 홍문섯골교회와 합류하여 하나 된 후 성장하다, 1902년 2월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서울 시찰회의 결정으로 교회가 폐쇄된 적이 있었다. 이때, 교인들은 구리개(동현[銅峴])의 제중원 내 예배처소로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다. 이때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가 운영하는 제중원은 그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다.
이번 자료조사를 통해 제중원은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주일예배와 성찬식 그리고 세례까지 베풀 수 있는 완전한 교회공동체였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선교 초기의 선교보고서나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제중원 안에 '은연중에 설립된 미조직 교회'에 대한 자료들을 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가 곤당골교회, 홍문섯골교회, 구리개(동현)교회 그리고 승동교회로 잇는 다리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옛 양화진 나루터 방향으로 걸었다. 양화진 나루터는 제물포와 강화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었다. 겸재 정선 그림 속에서 옛 나루터와 잠두봉(지금은 절두산), 관청 그리고 버드나무를 볼 수 있다. 양화나루가 왜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인지 보여 주고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서 옛 양화진 나루터로 오는 중간에 관청이 있었던 자리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이 사람과 물자를 나르는 곳 못지않게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덧 지금의 절두산 아래로 내려왔다, 2호선 철길이 머리 위로 지나고 양화대교가 바로 앞에 보이는 곳, 이곳에 과거 양화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다. ‘아! 이곳에 그가 한강에 첫발을 디딘 곳이겠구나‘ 제물포에서 강화를 거쳐 이곳 양화진나루터에 도착한 밤 10시경. 32세 청년이었을 그가 본 조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나루터 표지석을 보며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던 어둠 속에서 조선을 향해 품었을 그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몇 년 전 이곳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았었다. 그때 가슴을 뛰게 하였던 글귀가 있었다.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방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기념관 앞으로 갔지만, COVID-19로 인해 문이 닫혀 있었다. 어디 문을 닫은 곳이 이곳뿐이랴!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찾는 분이라면 시간을 내어 기념관을 둘러보길 권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나와 근처에 있는 '홍성사'를 찾았다. 생각보다 작은 건물이었다. "영향력은 건물의 크기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해 주는 듯했다.
옛 나루터의 역할은 지금의 도로와 한강의 다리들이 하고 있다. 하지만, 나루터의 본질적인 기능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도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의 묘원 앞에서 만난 3대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이 땅에 세운 교회와 그의 정신을 잇고, 다음 세대에도 알리고자 이곳을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우리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나루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야곱아! 넌, 가야 할 너의 길이 있단다.“
곤당골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 부부는 1892년 9월19일 화요일 오전에 제물포에 도착한 후, 그래함 리 목사와 함께 목선을 타고 강화도를 지나, 밤 10시경 양화진 나루터에 도착했다. 마중나온 새뮤얼 오스틴 모펫 (1864-1939) 선교사가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지금도 선교사들은 그곳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거치는데, 사무엘.F.무어 선교사는 조선인의 주택가에 집을 얻어 주변 사람들과 교류하며 한글을 익혔다. 그 외에도 마포삼열 선교사의 성경공부반을 인도하는 것을 돕거나, 언더우드 (1859-1916) 선교사가 시작한 예수교 학당에서 학생을 돌보았다. 그도 처음엔 어학 실력이 지지부진하게 발전하는 것을 답답해했다. 하지만 1893년 3월에는 쉬운 말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한국말로 기도를 인도하는 등 언어를 빨리 배워나갔다.
우리는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정착한 곤당골로 향했다.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 롯데호텔 방향으로 서울시청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최신경성전도[最新京成全圖]1) 와 비교해 봐도 도로의 폭이 넓어진 것 외에는 엣 모습이 남아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이곳이 곤당골이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곤당골은 조선 시대에는 '보은단골' 또는 '고운담골'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한문으로 표기하여 '미장동(美墻洞)'이라 하였고 한말에는 '미동(美洞)'이라 했었단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곤당골 근처에는 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으며 이곳에는 보통 양반을 비롯해서 부요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소수의 백정들도 모여 살았다고 한다.
1892년 겨울,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이곳 곤당골에 무료로 운영하는 소학교를 먼저 세웠다. 1900년대의 교육은 소수를 위한 교육이었다. 즉 아이들을 서당에 보낼 여유가 있는 부모를 가진 소수에게만 혜택이 될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세운 소학교는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한때 숭실학교와 숭실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던 1901년에 세워진 평양의 사랑방 학교를 세운 윌리엄 마틴 베어드(1862-1931) 선교사도 한때 이곳에서 교사로 일을 하였었다.
곤당골교회는 1893년 6월에 집을 완공하고 자기 집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설립이 되었다. 이곳은 지금의 롯데호텔과 조선호텔의 중간으로 알려져 있다. 원구단[圜丘壇]과 가까운 곳이었다.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전도할 때 책을 잔뜩 짊어지고 다녔다고 한다. 한글로 된 책을 큰소리로 읽으면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우리는 롯데호텔 맞은편으로 건너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옛 지도상에도 있는 길이었다. '아마 이곳이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큰 소리로 책을 읽고 또, 복음을 전했던 곳이 아닐까?' 감리교 목자이자 종교신학자인 제임스 헌틀리의 자료에 따르면 '창설 교인은 16명이고 첫해에 43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했다고 하니, 한때는 어쩌면 매일 그의 전도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외침을 들을 수 있는 골목이었을 것이다.
곤당골에서 교회를 시작하자 많은 하층민이 입교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정에 대한 언급은 박성춘을 만나기 전에는 단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승동교회 110년사 p93) 이때까지 곤당골교회는 백정 성도는 아직 없었다. 우리는 백정 박성춘과 사무엘 F.무어 선교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배경을 알고자 도심 가운데 흐르는 청계천을 보며 광교를 지나 그가 살았던 관철동으로 이동을 했다.
조선 시대 백정의 신분은 가장 천하고 낮은 신분이었다. 결혼할 때는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탈 수 없었고 죽어서는 지게에 실려 조용히 장사를 지내야 했다. 우리는 이곳 관철동애서 불과 몇 분 거리에 있는 곤당골의 예수 학당에 아들 봉출이를 입학시켜 자식에게는 자신과 같은 삶을 물려 주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숨과 눈물로 보낸 시간을 생각해 보면, 가깝고도 먼 거리였으리라! 어쩌면 박성춘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마지막 소망인 혈류증을 앓은 여인처럼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를 찾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이곳 관철동에서 백정 박성춘의 삶을 회고하며 점심도 먹을 겸 박성춘의 후예 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가 백정으로 가축을 도살하는 일을 했으니 혹시나 "박가네 축산"이 있지 않을까 싶어 간판을 유심히 보았다.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언제부터 백정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을까?“
그는 곤당골에서 살아가는 백정의 삶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을 것이다. 특히 봉출이를 데리고 찾아온 아버지 박성춘! 아버지의 삶을 자식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았을 그의 이야기와 사무엘.F.무어 앞에서 흘렸을 눈물은 사무엘.F.무어 선교사의 마음을 울렸을 것이다. '아마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예수 학당을 연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닐까!' 운명적인 만남 앞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감지했을 것이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봉출이를 통해 이 땅의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의 때가 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1894년, 외부적으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내부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갑오개혁(1894.7-1896.2)이 있었다. 홍법 14조를 통해 양반과 평민의 신분을 타파하고 백정과 광대등 천신분을 폐지하고 공사노비제도를 없애며 인신매매를 금지하는 법령을 선포하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서민들은 장티푸스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관자동에 사는 박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박가의 아들 봉출이가 곤당골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사무엘.F.무어 선교사에게 찾아가 울며 “아버지를 살려달라” 애원을 하였다.
'아! 조선 500년의 철웅성 같았던 신분 질서에 틈이 생기던 그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변화를 일으키고자 준비시킨 것일까!' 백정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백정 박성춘과 사무엘.F.무어 선교사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만남이 전쟁과 개혁 그리고 질병의 소용돌이 속에서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가 운영하던 제중원에 자주 말씀을 전하는 등 교류가 있었다. 봉출이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죽다 살아난 박성춘은 임금의 옥체를 만지는 그 손으로 자신과 같은 천한 사람의 몸을 만지고 고쳐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1894년 봄에 곤당골교회로 출석하게 되었다.
1895년 4월 20일, 이날은 곤당골교회로서는 참으로 기쁜 날임과 동시에 가슴 아픈 날이었다. 박성춘이 세례를 받기까지 1년 동안, 자신이 백정임을 숨겨야 했다. 사무엘.F.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백정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교회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 양반 신자들은 자신들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백정도 진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행전9:43은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여기서 무두장이는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피혁제조업자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우리의 백정과 같은 직업을 가진 무두장이를 기피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사도행전10장에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듯이 그의 집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므로 백정 박성춘이 교회로 나와 세례를 받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조차도 양반과 백정이 한 하나님의 자녀로 한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양반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양반 성도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이때 이 주사라는 사람이 양반들이 앞자리에 앉고 백정들은 뒷자리에 앉게 한다면 다시 출석하겠다고 중재를 해 왔다.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혹시 교회에 출석하지 않
는 양반들이 교회를 따로 세우거나 아니면 양반 신자들 가운데 어느 한 집에서 예배를 드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승동교회 110년사 p95) 그럼에도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 방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며 중재안을 거절했다.
결국, 교회는 둘로 나뉘게 되었다. 양반을 중심으로 홍문섯골교회가 세워졌다. 교회는 설렁해졌고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와 남은 교인들은 실의에 빠졌었다고 한다.(승동교회 110년사 p95) 홍문섯골교회와 곤당골 교회는 걸어서 불과 10분 이내의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먼 곳도 아닌 가까운 곳에서 한 교회 성도가 둘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겠구나!'는 생각이 더더욱 들었다.
구리개로
1895년 4월 20일. 양반 성도들은 백정 성도들과 한 공간에서 분리되지 않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홍문섯골교회를 세워서 나갔다. 실의에 빠진 시간을 이겨내고 1895년 가을, 곤당골교회는 세레 교인이 43명으로 늘어나는 등 교인 수가 57명이 되었다. 또한, 홍문섯골교회의 경우 정식적인 교회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발전하였다. 비록 양반들이 사회적인 인습에서 백정과 자리를 같이하여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나갔으나 그것은 성경 말씀에 따르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당시 선교사들은 홍문섯골교회를 공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문섯골교회는 교회를 담당할 선교사도 없이 2년 8개월간 나름대로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성장하다 1898년 초에 정식적인 교회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1898년 6월 17일 뜻하지 않게 곤당골교회가 화재로 인해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두 교회가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1899년 가을 분리된 지 4년 6개월 만에 일이었다. 두 교회가 하나가 되기 전 홍문섯골교회가 정식적인 교회로 인정을 받은 이후의 일이기도 했다, 곤당골교회의 성도들도 화재로 인한 일은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다시 하나의 교회가 된 것이 무척이나 기뻤던 것 같다.(승동교회 110년사 p101) 결국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는 다시 연합한 홍문섯골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교회를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교회가 합친 2년 동안 교회는 성장했다. 매 주일 오후가 되면 홍문섯골교회의 교인들은 제중원에 찾아가 환자들을 위해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위로했다. 하지만 1901년 12월 사무엘.F.무어 선교사가 아내 로즈 선교사의 폐결핵으로 미국으로 치료차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또 한 번의 시련이 다가왔다. 사무엘 F. 무어 선교사가 그 동안 양반 교인과 백정 교인들의 문제를 잘 봉합해 왔으나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 그들을 조정할 사람이 없었고 서울시찰회의 간섭이 심해지자 이에 반발하자 서울시찰회는 홍문섯골교회를 폐쇄하였다.
훗날 지금의 승동교회가 되었지만, 양반과 백정 성도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906년 곽안련 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교인들 간 계급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지적을 하며 "백정 문제가 우리 교회에서는 제일 어려운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백정들에게 전도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하는 문제와 또한, 박씨 형제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까지는 교회 조직이 잘 안될 모양이다"라고까지 했다. 교회가 승동(인사동)으로 옮길 시절에도 이 근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양반이었는데, 그들 중에 많은 교인은 백정들을 피하느라고 연못골(연동) 교회로 옮겨가기도 했고, 1909년에는 일부 양반들을 중심으로 안동교회로 분리되기도 했었다.
선교사회는 홍문섯골교회가 시작될 때부터 선교사회의 지도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해가려는 것을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사무엘.F.무어 선교사가 미국에 가 있는 1902년 세레교인 89명, 원입교인이 150명이었던 이 교회를 하루아침에 폐쇄해버렸다.
우리는 이때, 홍문섯골교회의 바람막이가 되었던 구리개(동현)에 있는 제중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때 한국외환은행(현 하나은행)이었고 인터넷에 있는 제중원 표지석을 찾아갔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었다. 아쉽지만 사진으로나마 옛 표지석 자리를 남겨보았다. 구리개 제중원은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주일예배와 성찬식 그리고 세례까지 베풀 수 있는 완전한 교회공동체였다. 어쩌면 공유교회의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중원을 통해 홍문섯골교회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구리개 교회(동현교회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중앙교회라 불렀다)와 세브란스병원이 신축된 이후, 따라갔던 성도들이 세운 남대문교회 등 몇 개의 교회가 제중원을 기반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때 구리개교회(동현교회)는 이눌서 선교사(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선교사가 담임목사로 왔고, 훗날 이눌서 선교사의 뒤를 이어 승동교회 3대 담임목사가 된 곽안련 선교사(C.A. Clark 1878-1961) 선교사도 전도사로 함께 섬겼다.
우리는 한때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의 사택이 있던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올라 명동성당 방향으로 가다보면 지금의 YMCA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그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사택과 병원을 오가며 응급상황에 바쁘게 움직였을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곤당골에서 박성춘의 치료를 도와 달라며 이 언덕길을 달렸을 사무엘.F.무어 선교사도 상상해 보았다. 왕진 가방을 들고 어쩌면 이 땅의 백정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고자 두 사람이 달렸을 좁았던 이 언덕길이 곤당골교회의 희노애락을 말해주는 듯했다.
승동으로
구리개의 제중원에 있던 예배처소는 홍문섯골교회의 교인들의 오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제중원이 선교병원이 된 이후 매달 연 500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되자 확장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가 안식년에 뉴욕에서 열린 선교회의 석상에서 병원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자 클리브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가 15,000불을 헌금하고 이후 대지와 건물을 위하여 3배나 추가로 기부하였다. 1902년 11월 27일 오후 3시 새 병원 건립을 위한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1904년 11월 병원이 개원되었다.
1904년 제중원 터와 건물은 왕실의 요구로 정부에 환수되자 제중원 예배실에서 모이던 교우들은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홍문섯골교회의 교인들이 오기 전 제중원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으로 함께 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남대문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남대문 밖으로 가지 않은 홍문섯골교회의 교인들을 위해 북장로교 선교부는 교회부지를 구입해 주기로 결정했다. 이에 1904년 12월 하순 추운 겨울에 구리개에 있던 다수의 교인은 급한 대로 낡은 집으로 이전을 하였다. 그들은 낡은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로 결정하고 곤당골 터를 9,000원에 팔고, 필라델피아에 사는 컨버스가 5,500원을 보내주었다. 1905년 8월 1일 이전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관철동을 지나 승동으로 갔다. 과거엔 피맛골로 알려진 거리도 보았다. 지금은 옛길은 많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옛날 이 거리를 가득 채웠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지금의 인사동에 위치한 승동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 쪽에는 승동교회의 역사가 사진 자료로 전시되어 있었다. 사무엘.F.무어 선교사가 1906년 11월 중순경 세브란스에 입원하여 5주 후 1906년 12월 22일 46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니 그의 생전에 이곳 승동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곤당골에서 두 교회로 분리 후 실의에 빠졌던 시간, 하지만 두 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어 성장하던 기쁨, 하지만 부인의 치료차 미국에 있는 동안 교회는 폐쇄되고 교인들은 제중원안의 예배처소로 옮기게 되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하나님의 손에 맡긴 채 주어진 소명을 따라 복음을 외치며 교회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그의 마지막 열매인 동막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제 구리개에서 제중원이 남대문 밖으로 건축되어 이전할 당시, 어디로 가야할지 씨름했을 교인들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이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이 분명하다. 선교회에서 부지를 매입해 주고, 교인들과 여러 후원금을 통해 어려움 중에도 축복받으며 교회가 세워졌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주님이 세워나가심이 분명하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백정과 양반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도 끝나지 않은 COVID-19 상황을 이겨내고, 앞으로 다가올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여기까지“ 우뚝 설 수 있길 이곳 간절하게 기도했다.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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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림교회에서 전도사(2000.4 ~ 2002.8)로 섬겼다. 풍성교회에서 전임전도사, 강도사, 그리고 부목사로 섬겼다(2002.8 ~ 2010.12). 2011년 인천광역시 계양구 효성동에 교회를 개척하여 조선에서 14년을 사역하는 동안 양 반과 백정의 신분의 벽을 넘어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곤당골교회를 시작으로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를 세우다 부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종 사무엘 F. 무어 선교사를 이어, 이 땅에 복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양 한 문화의 사람들과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엡2:22)를 세우고 있는 목회자이다.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졸업
- (현)다인교회 담임목사(2011 – 현재)
- (전)GMS국내다민족사역연합체 출판팀장(2020-2021)
- (전)계양구다문화가족협의회 위원(2019~2020)